여학생 체육 활성화를 위한 양성평등 선포식'을 기점으로 여성 스포츠 리더 목소리 높여야
“‘더 빠르게, 더 높게, 더 힘차게’는 남성 중심의 올림픽 표어다. 양성평등 시대에 맞게 ‘활기차게, 조화롭게, 정의롭게’로 바꿔야 한다고 생각한다.”
국내 여성체육의 선구적 실천 모델로 창립된 한국여성체육학회(이하 여성체육학회)가 올해 61주년을 맞았다. 여성체육학회는 1954년 김신실 초대 회장이 설립한 후 지금까지 연구와 교육을 중심으로 여성체육 발전을 주도해 왔다. 지난 4월 10일 여성체육학회 춘계학술대회에서는 의미 있는 행사가 있었다. ‘여학생 체육 활성화를 위한 양성평등 선포식’이었다. 나아가 ‘체육 양성평등법’ 제정이 목적이다. 선포식을 주도한 인물은 지난해 25대 회장에 취임한 원영신(59) 회장이다.
“우리가 그동안 가졌던 서러움을 후배들한테는 물려주지 말아야 한다. 그래서 성차별이 없는 구조를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 체육 양성평등법이 필요한 이유다.” 원 회장은 1972년 미국 교육평등법 ‘타이틀 나인’이 여학생 체육 활성화의 초석이 됐듯이, 한국도 이러한 법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미국이나 유럽에 비해 많이 늦은 만큼 강제성을 갖고 밀어붙이는 것도 필요하다는 생각이다. “양성평등 시대에 맞게 학교 체육부터 나아가 올림픽까지 변화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국내에서는 여성체육학회가 그러한 역할을 해 나가고 있다.”
여성체육학회는 올해를 기점으로 사회변화에 걸맞은 역할을 해낼 수 있도록 관련 단체 및 관계자들과 교류하며 인력자원의 역량을 모아 ‘여성을 위한, 여성에 의한, 여성의 체육활동’ 강화와 글로벌 확대 등을 도모하겠다는 계획이다.
원영신 회장은 엘리트 선수 출신은 아니다. 체육계에서는 귀한 전통 여성 체육학자다. 현재 연세대 스포츠레저학과 교수이기도 하다. “어릴 때부터 수영, 테니스, 무용 등 운동 배우는 것을 좋아했다. 원래는 가정대학을 가려고 했는데 담임이 체육과를 권했다. 사실 그때 이민을 준비하고 있었는데 지연이 돼 지원을 결심하게 됐다.” 그렇게 연세대 체육과 76학번이 됐다. “(여성체육학회 10~12대 회장인) 한양순 교수님 영향을 많이 받았다. 리듬체조, 발레 등 체조 분야로 나아갈 수 있게 이끌어 주신 분이다.”
원영신 회장은 체육계에서는 ‘체조 전도사’로 잘 알려져 있다. 1990년에 국민체육공단 국민체조 공모전에서 29개 팀 중 1등을 했다. 1992년에는 문화체육관광부(당시 문화부) 우수문화공모전에서 퇴계 이황이 쓴 건강서적 『활인심방』에 나온 동작을 활용해 만든 ‘양생(養生)체조’가 당선됐다. “우리 체조의 우수성을 검증하기 위해 만든 것도 있지만, 사실 성과를 올리는 목적도 있었다. 이듬해 호주학회 발표에서 외국 체육인들이 내 스토리텔링 발표에 크게 관심을 가지는 것을 보고, 세계화는 따라하는 것이 아닌, 우리 것을 세계에 알리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알게 됐다고 한다. 이후 우리 문화를 알리는 사명감으로 체조 개발과 보급에 힘써 오고 있다”.
원 회장은 고령화시대를 맞아 글로벌시니어 건강증진개발원 회장직도 겸하며 건강체조 보급에 동분서주하고 있다. 세계대학스포츠연맹 양성평등위원회 위원으로도 활동하고 있다. 쉼 없는 왕성한 활동은 가족의 든든한 지원이 있기에 가능했다. 그림 동아리에서 만난 남편은 언제나 든든한 후원자이고, 두 아들은 최고 지원부대다.
“여성 체육인의 권익 신장을 위해 ‘체육 여성할당제’ 필요”
체육계만큼 남성 중심적이며 보수적인 곳은 찾기 힘들다. 체육계가 남성 중심의 견고한 성벽을 이루게 된 것은 여성 체육인들의 노력이 부족했다는 시선도 있다. ‘여성 대통령’ 시대에도 체육계의 ‘유리천장’은 여전히 굳건하다. 일례로 대한체육회 정가맹 57개 경기단체 중 여성이 회장인 곳은 대한에어로빅협회(회장 류지영)가 유일하다.
“여성체육학회가 출범한 1950년대에 여성이 할 수 있는 것은 극히 제한적이었다. 그것을 깨고 나온 것이 여성 체육인이라고 생각한다. 과거 ‘페미니즘의 선두자 여성 체육인’이라는 글을 기고한 적도 있는데, 우리 여성 체육인들은 자유, 평등을 직접 몸으로 보여줬다. 치마저고리만 허용되던 시기 반바지를 입고 남성과 동등하게 뛰었다. 근대올림픽 창시자인 쿠베르탱 남작조차 초기에는 ‘여자가 운동을 하면 추하다’는 말을 서슴없이 했다. 그런 환경에서 한국 여성 체육인들은 묵묵히 경기에서, 학교에서, 생활에서 몸으로 보여줬다고 생각한다.”
원영신 회장은 여성 체육인의 권익 신장을 위해 의사결정 과정에 참여할 수 있는 위치로 여성들이 많이 진출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러기 위해 필요한 것이 ‘체육 여성할당제’라고 한다. “한국은 경기 체육에서 남성보다 여성이 더 좋은 성과를 올리는 경우가 많다. 올림픽에서도 여성들의 활약은 더 뛰어나다. 하지만 국내 체육계의 구조와 지배적 계층은 남성이 주를 이루고 있다. 이는 비단 경기 체육뿐만이 아니다. 학계에서도 여성 체육학자는 손에 꼽는다. 기득권층으로 가면 설 자리가 더욱 좁아진다. 구조적인 문제가 가장 크다고 생각한다. 정치권에서 여성할당제를 법제화하는 노력이 이어지고 있는데, 꼭 필요한 제도라고 생각한다. 체육계도 마찬가지다.”
그는 인터뷰 말미 후배들에게 당부의 말을 전했다. “요즘 여학생들은 우리 시대처럼 위축됨이 없다. 남녀 불평등 없이 자랐다는 증거다. 하지만 사회에 나와 좌절하는 경우를 많이 본다. 아직도 사회 곳곳에 남녀차별이 폭탄처럼 존재한다. 특히 체육계는. 그래도 ‘좌절 금지’다. 갈매기도 꿈을 꾼다.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다. 우리 선배들은 사회적 책임을 가지고 길을 터줘야 하고, 후배들은 길을 닦아 나아가야 한다.”